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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새소식

'조립 PC의 황혼기'를 맞이한 아키하바라

by 테리™ 2008.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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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권봉석

PC 시장, 특히 조립 PC 시장이 지난 2001년, 윈도우 XP(Windows XP) 발매 이후를 기점으로 계속 침체를 겪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업그레이드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보였던 윈도우 비스타(Windows Vista) 역시 국면 전환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여기에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겹치며, 용산전자상가는 일찍 찾아온 한 겨울에 신음하고 있다. 이러한 침체기는 조립 PC를 ‘자작 PC(自作PC)’ 라 표현하는 이곳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난 10월 30일, 아키하바라(秋葉原)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1947년에 설립되어 1978년에 아키하바라에 최초로 PC 전문점을 개설한 츠쿠모 전기(九十九電機, Tsukumo Denki)의 도산 소식이었다.

아키하바라의 노장, '츠쿠모 전기'의 도산!

츠쿠모 전기는 거점인 아키하바라에 총 7개의 점포를 비롯해, 도쿄(東京)에서는 타카다노바바(高田馬場), 타마치(町田) 등 총 세 지역에 점포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北海都)의 삿포로(札幌),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등에 점포를 가지고 있다.

아크로팬의 지난 기사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츄오도리()에 하나 남은 유일한 PC 전문점인 츠쿠모 ex(Tsukumo ex) 역시 츠쿠모 전기가 소유한 매장 중 하나이다. 츠쿠모 전기는 주력 사업인 PC 관련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이외에, 지난 2005년에는 ‘츠쿠모 로봇 왕국(ツクモROBOT王国)’ 이라는 이름으로 취미용 로봇 매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 참고자료 : http://www.acrofan.com/ko-kr/life/content/20070901/0002010301


▲ 아키하바라 츄오도리의 유일한 PC 전문점 '츠쿠모 eX'

이처럼 여러 점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가운데에도 20년 넘게 영업을 해 오던 츠쿠모 전기는 지난 10월 30일, 도쿄지방법원(東京地方裁判所)에 '민사재생법(民事再生法)' 적용을 신청했다.

'민사재생법'이란 파산상태에 놓인 개인이나 기업을 대상으로 채무 조정을 통해서 경제 상태나 경영 상태의 회복을 돕는 법이다. 국가가 진행하는 워크 아웃(Work-Out) 작업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겠다. 우리나라에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개인파산 제도가 존재하나, 기업의 회복을 돕는 제도적인 장치(법)는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츠쿠모 전기가 이러한 민사재생법의 적용을 신청했다는 것은, “우리 파산 지경입니다”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회사측에서 밝힌 총 채무액은 2008년 8월 말 현재 110억 엔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약 1400억원이 넘는다. 아울러 8월 말까지의 채무액이 110억엔이므로, 앞으로 이 액수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조립 PC의 부진은 일본도 마찬가지

예전부터 일본에서는 ‘조립 PC = (전문 메이커 제품보다) 싸다’ 라는 인식이 있었고, 지난 1995년에 윈도우 95가 발표된 이후로는 조립 PC 붐이 일기도 했다. PC의 하드웨어에 대한 지식을 좀 더 쌓고 싶어하는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잡지들이 발간되는 등, 20세기 말은 조립 PC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조립 PC 시장은 지난 2001년, 윈도우 XP 발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후지츠, NEC 등 일본의 전문 메이커에서 내놓는 완제품 PC의 가격이 급속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원인이다.

굳이 골치아픈 여러 지식들 없이도, 조금만 더 투자하면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된 제품을 살 수 있는데다가 문제가 생기면 메이커의 고객 지원 서비스를 받으면 그만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발품 팔거나 고민해 가면서 조립 PC를 살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새 버전이 발표될 때마다 업그레이드 수요를 제공해 왔던 윈도우 제품군도 조립 PC 시장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굳이 윈도우 비스타를 사용하지 않아도 윈도우 XP에서 거의 모든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윈도우 XP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도 있다. 얼른 물러나야 할 윈도우 XP가 오히려 윈도우 비스타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또한 윈도우 비스타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CPU부터 그래픽 카드 등 거의 모든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PC의 사양이 상향 평균화 된 요즘은, 저가형(보급형) PC로도 인터넷 접속이나 업무용 프로그램 사용에 전혀 지장이 없다. 때문에 일부러 큰 돈을 들여가면서 운영체제를 바꾸려는 사용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다 보니 현재, 일본에서 PC 조립은 대세가 아닌 ‘취미’ 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처럼 어느 CPU를 써야 할지, 혹은 어느 그래픽 카드가 더 성능이 좋은지를 진지하게 따지면서 직접 PC를 조립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PC 잡지에 투고를 하는 독자층을 보아도 안정된 가정을 가지고 있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 대부분이며, 중/고등학생들이나 20대 중반의 독자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다. 창간 17주년을 넘어선 하드웨어 전문지가 휴간(실질적으로는 폐간)하거나, 혹은 휴간된 잡지가 열성 독자들의 요구에 못이겨 슬그머니 복간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형편은 어떤가? 대형 유통사의 부도설이 흘러나오고, 수입 업체들이 천정부지로 뛴 환율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우리나라는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듯 싶다. 아무리 내년에 윈도우 차기 버전이 출시된다 해도, 이 또한 조립 PC 시장에 호재가 되지 못할 것은 뻔한 사실이다.

소수 마니아나 블로거들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최근 발표한 '윈도우 7' 운영체제에 열띤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더욱 더 그렇다. 지난 2001년, 윈도우 XP가 출시되기 전과는 천지 차이이다. 하긴 당장 먹고 사는게 팍팍한데, 돈이 생기기는 커녕 돈이 달아날 일(업그레이드)에 관심을 쏟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츄오도리에 'PC전문점이 사라지는 날' 오나?

아키하바라에서 오랜 기간동안 버텨왔던 업소가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이전에도 경영 악화를 이유로, 혹은 사업 계획 변경으로 사업을 정리하는 업체들이 종종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츠쿠모 전기가 민사회생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면, 츄오도리를 홀로 지키는 츠쿠모 eX는 빚잔치를 벌이는 와중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츄오도리는 이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 등에 상당 부분 주도권을 내 주었다. PC 전문점들은 이미 츄오도리에서 밀려나 소규모로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츄오도리에 우뚝 솟은 츠쿠모 eX는 단순한 전문점이 아닌 ‘마지막 자존심’ 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츠쿠모 eX가 사라진다면? 현지 상인들의 심적 충격이 어떠할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나마 일본의 아키하바라는 윈도우 비스타가 발매되던 날 철야 발매등의 이벤트를 벌이고, 주요업체 관계자가 직접 찾아와 행사를 벌이기도 하는 등 우리네 용산보다는 그나마 조금 더 상황이 나은 곳이다. 형편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아키하바라에서조차 천억원대의 빚을 지고 도산하는 업체가 나오는 판이니, 손님 끊긴지 오래된 용산이 어떨지 뻔하다. IT 업계 종사자로써, 참으로 걱정이다.


▲ 이제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이 주류를 이룬 '츄오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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